박사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이언주
나. 로마의 인문교양 : 후마니타스와 비르투스의 실현
로마의 인문교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의 파이데이아를 동경했 던 키케로(M. T. Cicero)의 인문학, 즉 ‘후마니타스(humanitas)13)’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에 대한 키케로의 생각은 그가 법정에서 시인 아르키아 스(Archias)를 변론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로마에서 ‘파피우스’법의 제 정에 따라 아르키아스라는 그리스계 안티오키아 출신의 한 시인이 추방될 처지에 놓이게 되자, 키케로가 나서서 그를 구해준다. 키케로가 아르키아스 를 변론한 내용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아르키아스 변론』제12 장~14장, 안재원 역, 2014: 24~25).
“[12장] (상략) [검사] 그라티우스여, 자네는 우리에게 묻고자 할 걸 세. 우리가 이 사람을 이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이냐고 말일세. 왜냐하면 이 사람은 우리에게 힘을 주기 때문일세. 소란 스러운 광장의 다툼들로 지친 우리의 마음에 생기를 다시 불어 넣어주 기에 말일세. 그리고 말싸움에 이력이 난 우리의 귀가 휴식을 취하고자 할 때에 말일세. 아니 내가 매일 저 일상의 복잡 다양한 일을 처리하면 서 수없이 말을 쏟아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자네는 여기는가? 내가 이 학문으로 마음을 닦지 않았다면 말일세. 혹은 마찬가지로 이 학문을 통 해서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면 그 스트레스를 내가 견딜 수 있다고 자네는 보는가? (하략)
[13] 따라서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아니 누가 당당하게 나에게 삿대질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놀 자 판 축제만을 위해서, 여타의 오락만을 위해서, [뭔가를 잊고 즐기는 것만 추구하는] 마음과 몸의 휴식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밤늦은 술자리에, 주사위[도박]에, 공놀이에 허비했다면, 나는 나 를 위해서 이 학문들의 광맥(鑛脈)으로 돌아와 깨고 닦고 가꾸는 데에 그 시간을 투자했기에 말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다음의 사실로 말미 암아 저의 말에 더 동의하실 수밖에 없으실 것입니다. 즉, 지금하고 있 는 이 연설도, 비록 미력하지만 저는 위험에 빠진 친구들을 구하는데 실패한 적이 결코 없었던 저 능력도, 그 뿌리가 실은 이 학문들에 두고 있고 [여기에서] 성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별 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여길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저 최고의 위력을 어떤 샘으로부터 길어 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 히 느끼고 있습니다.
[14] 만약 내가 무릇 한 인생을 살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칭찬과 명 예를 추구하는 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그런데 이것들을 실천하면서 [부딪히게 되는] 신체의 고통과 죽음과 추방의 위험까지도 대수롭지 않 게 여겨야 한다는 인생 좌우명을 어린 시절에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과 많은 글들로부터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당신들의 안전(나라의 안 전)을 위해서 저 숱한 종류의 그리고 저 대단했던 전투에 그리고 오늘 벌이는 이 재판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드는 불량배들의 공격에 이 한 몸을 내던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책들은 모범사 례(模範事例)로, 현인들의 목소리는 규범전례(規範典例)로, 옛 역사는 전 범선례(典範先例)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만약 문자의 빛이 가미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모범들은 어두움 속에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 스와 로마의 작가들은 가장 용감했던 이들을, 경탄뿐만 아니라 본받음 의 대상이 되도록 얼마나 많은 모범 인물을 저술해 [우리에게] 전해주 고 있습니까? 내가 국가를 통치할 때, 나의 마음과 정신을 이끌어주고 지켜 준 것은 이 위대한 분들에 대한 생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분들을 항상 마음의 첫 자리에 모셔두곤 했습니다(『아르키아스 변 론』제12장~14장, 안재원 역, 2014: 24~25).”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키케로가 변론하길 아르키아스와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추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키케로는 자신 이 평소 이 학문으로 마음을 닦았고, 이 학문으로 마음의 긴장을 풀었으며, 이 학문의 탐구에 헌신하였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키케로의 변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단지 시인 아르키아스만을 구제하기 위해 나섰다고 보기 보다는 바로 ‘이 학문’을 구제하기 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케로가 이 토록 강조하였던 ‘이 학문’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humanitas)'이라 부르는 학문이다(안재원, 2014: 28). 키케로에 따르면, 이 학문은 평상시에 ‘별 것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언젠가는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 이다. 키케로는 이 학문이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경우에 힘이 되 고, 국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더욱 더 그렇 다고 강조하면서, 정신과 영혼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이 학문을 하는 사 람들을 당장 쓸모가 없다고 추방하는 사회는 더 이상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야만(barbarus)의 세계임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키케로는 이 학문의 목적과 학문적 특성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설명을 남겼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목적(quae ad humanitatem pertinent)에 봉 사하는 모든 학문들은 서로가 서로를 묶는 공통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고 마치 혈연에 의해 연결된 것인 양 상호 결속되어 있다(Cicero, 『아르키아스 변론』제2장, 안재원 역, 2014: 23).
이상과 같은 키케로의 견해에 따를 때 인문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 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인문학은 이와 같은 목적에 봉사하는 학 문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이라 불리어지는 학문들은 모두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목적을 가짐으로써 서로 공통의 연결 고리를 가지 고 있고,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궁극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관되는 학문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문학에 대한 유려한 키케로의 변론은 인문학의 원형적 개념과 학문적 특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그러나 키케로가 말하는 인간다운 인간이란 어떤 사람이고, 인문학은 어떤 점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견해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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