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이언주
II. 도덕과 교육과 인문학
‘인문학을 활용한 도덕과 교육의 개선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덕과 교육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문학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개념을 규명하고, 이를 바 탕으로 하여 도덕과 교육의 관점에 입각하여 인문학의 의미를 정립해 볼 것이다. 이장의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구체적인 연구의 내 용과 과정이 필요하다.
첫째, 인문학의 개념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도덕과 교육에 입각한 인문 학의 개념을 정립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동 서양사상에 나타난 인문학 의 역사적 궤적을 고찰하여 인문학의 고전적인 의미를 규명해 볼 것이다. 이 때 인문학의 고전적인 의미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인문학의 원 형적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인문학의 전통적 개념 과 아울러, 인문학의 현대적 의미도 규명해 볼 것이다. 여기서 인문학의 현 대적 개념이란, 동 서양 사상의 지적 계보를 통해 이어져 온 인문학의 원형 적 개념을 보존하면서도 특히 오늘날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기대할 수 있 는 바들을 강조함으로써 규명되는 개념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와 같이 인문 학의 고전적 현대적 의미를 규명한 것을 토대로 도덕과 교육의 관점에 입 각한 인문학의 개념을 정립해 볼 것이다.
둘째, 도덕과 교육과 인문학이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특히 도덕과 교육에서 핵심적으로 설정하고 있는 자율적이고 통합 적인 인격 내지 도덕성, 핵심 가치 덕목을 가르치는 일과 인문학이 어떻게 교차될 수 있는지를 밝혀 볼 것이다. 끝으로,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규명될 수 있는 바들을 근거로 하여 인 문학의 도덕교육적 활용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인문학의 도덕교육적 의미를 규정해 볼 것이다. 이 장에서 연구할 내용 및 과정을 도식화하면 다음의 [그림1]과 같다.
1. 인문학의 개념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인간의 존재의의와 가치를 탐구의 대상으로 하 고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여 답하고자 하는 인문학(humanities)은, 그 분 야와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인문학의 개념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규명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동․서 양의 역사적 궤적을 중심으로 인문학이 지닌 원형적인 개념을 규명할 것이 다.
이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로는 첫째, 인문학에 대해 동․서양사상적으로 접근하여 인문학의 개념을 밝혀 본다. 특히 동양사상적으로 접근하여 ‘인문 (人文)’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 보고, 유학적 전통에서의 자기 수양과 인간 의 품격론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동양에서의 인문학의 개념을 규명한다. 동시에 서양사상적으로 접근하여 고전적 개념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 이아(Paideia), 로마의 후마니타스(Humanitas), 근대적 개념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의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 신인문주의에서의 교양 (Bildung), 사회개혁의 토대로서 교양(culture),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개념의 다양한 변용을 고찰하고, 이러한 변용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인 문학의 본질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서양에서의 인문학의 개념을 규명한 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인문학의 고전적 의미를 규명해 볼 것이다.
1) 인문학의 고전적 의미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은 인간의 삶에 관한 고민과 탐구에 집중 해 왔다. 특히 오늘날에는 인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시도를 통하여 감성인문 학, 마음인문학, 디지털인문학, 의료인문학, 신경인문학, 소통인문학 등의 다 양한 형태로 인문학이 분화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학문의 지평에서 인문학은 과연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인 문학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인문학의 근원적 뿌리를 고찰하고 그 원형적인 개념을 먼저 규명해 본다.
(1) 인문학의 동양적 의미
가. 人文의 의미 : 인간의 무늬(紋) ‘인문학’이 말 그대로 ‘인문에 대한 학문’이라고 했을 때, ‘인문’이란 글 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人文이라 는 한자어가 갖는 문자적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먼저 人의 의미와 관련하 여, 중국 후한 때 문자학자 허신(許愼)은 당시 갑골문의 모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저술한 『설문해자』에서 人을 ‘천지(天地)의 태어난 것(性) 가운 데 가장 귀한 것’이며 ‘팔 다리의 모양을 상형하였다’고 풀었다(許愼, 오채 금 공역, 2015). 이러한 허신의 견해는, 통상적으로 人자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모양을 그린 글자로 판독하는 것과는 다른 견해이다. 人자에 대한 통 상적인 견해는 코메니우스(J. A. Comenius)의 『세계도회(orbis sensualium pictus)』에서도 나타난다.
코메니우스는 ‘humanitas(humanity)’에 관한 설명에서 위의 그림을 제시 하였다. 이 그림에서는 삶의 터전인 들판의 한 중앙에서 서로 포옹하고 있 는 두 인물이 한자로 人자를 형상하고 있는데, 코메니우스는 이 그림을 통 해서 인간은 서로 서로를 유익하게 해주는 존재임(ad mutua commoda)을, 곧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그래서 인간(人間)임을 설명하였다(안재원, 2014: 30).
하지만 이같은 견해와는 달리 허신은 人을 한 사람의 팔 다리 모양을 상형화한 것으로 보았다. 허신의 풀이와 유사하게, 실제 갑골문에서 발견된 人자는 한 사람이 손을 펴고 서 있는 모양을 본뜬 것으로 나타났다(石定果 羅衛東, 이강재 역, 2013). 의 상단부는 머리고, 앞갈래는 팔이며, 뒷갈래 는 몸통을 거쳐 발까지 내려 뻗은 모양이다. 갑골문에서 보는 人자의 전체 모양은 한 사람이 서서 가려고 하고 있는 모양을 옆모습으로 그린 원시형의 상형문자라고 판독할 수 있다(최창렬, 2001). 人자가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文자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자전에서 찾아볼 때 文자는 글월, 문장, 서적, 문체(文體)의 한 가지, 채색(彩色), 무늬, 학문이나 예술, 법도, 예의, 조리(條理), 얼룩, 아름다운 외 관, 빛나다, 화려하다, 아름답다, 선미(鮮美)하다, 몸에 새기다, 꾸미다 등의 다양한 함의를 내포한다.
따라서 人文에서 文이 뜻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자료에 남아있는 文자의 궤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백천정(白 川靜)의 『자훈』에 나타난 文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文자 는 “원래 가슴에 먹으로 문양을 새겨 넣은 사람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상 형문자(白川靜, 1984: 759; 이승환, 2007: 28)”로 풀이되고 있는데 이는 文자 의 의미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상형문자로서 文의 최초의 문자적 형태는 갑골문과 금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갑골문과 금문에 나타난 文의 형태는 다양하나 대동소이하여 대체 적으로 지금의 文자 안에 어떤 문양이 표시된 모양으로, 학자들은 문신을 한 사람의 앞모습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文은 새긴 그림으로 교차하는 무늬(文, 錯畵 也. 象交文)”로 설명하였다. 이는 『설문해자』가 갑골문을 모양을 보지 못 한 상태에서 저술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갑골문의 형태 및 의미와 일 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로 볼 때, 文은 ‘인간의 몸 에 아로새긴 무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과 논의를 통해서 人文은 ‘인간의 무늬’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人자와 文자 각각의 어원을 통해 유추해 낸 것이기 때문에 단일어로써 人文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는 좀 더 논의 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人文이라는 단일한 글자가 등장하는 문헌을 통 해서 그 의미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人文이라는 말은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자료 중에서 『주역』에서 최초로 출현한다(樓宇烈, 황종원 역, 2011: 91) 『주역』 비괘 에는 다음 문구에서 등장한다.
剛柔交錯, 天文也, 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 乎人文, 以化成天下 (『周易』 賁卦 )
주역의 이 문구에 人文은 天文과의 대비를 이루며 등장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왕필(王弼)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강유가 교착하여 무늬가 이루어지게 됨이 하늘의 문채(무늬)요. 문 명으로써 제어함은 사람의 무늬이다. 하늘의 빛나는 무늬를 잘 관찰해 서 때의 변화를 살피며, 사람의 빛나는 문채[紋]를 잘 관찰해 천하를 교 화하여 이루니라(왕필, 임채우 역: 184).
왕필의 해석으로 볼 때, 人과 文이라는 각각의 문자적 어원을 통해 유 추해 낼 수 있는 人文의 의미가 단일한 글자로서 人文의 의미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人文의 의미와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 어서는 앞의 주역 문구에 대한 해석을 좀 더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왕필은 앞의 주역 문구에서 “文明以止, 人文也”를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止物不以威武, 而以文明, 人之文也
즉 “사람을 무력으로써 그치게 하지 않고 문명한 덕으로 제어함이 인간의 무늬”이다(왕필, 임채우 역, 2006: 184). 이러한 왕필의 주석에 대하여 러우위례(樓宇烈)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예의를 사용하여 천하 만물이 각기 있을 곳을 얻게 한다면 이를 인문이라 부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 하였다. 이 같은 주역에 대한 해석은 왕필에 이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에 의해 보다 구체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 공영달은 『주역』의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觀平人文以化成天下者, 言聖人觀察人文, 則詩書禮樂之謂, 當 法此教而化成天下也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하고 풍속을 이룬다’는 것은 성인이 관찰 하는 인문을 시·서·예·악으로 보는 것으로, 마땅히 이 가르침을 본받아 천 하를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어야 함을 말한다(樓宇烈, 황종원 역, 2011: 92). 이 같은 人文에 관한 해석은 정도전의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정도전은 주역 의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정도전,『삼봉집』,「권」, 도은문집서).
日月星辰, 天之交也, 山川草木, 地之交也, 詩書禮樂, 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人則以道.
주역의 구절에 대한 정도전의 풀이를 이승환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 다.
하늘에는 일․월․성․신과 같은 ‘하늘의 무늬’가 있고, 땅에는 산․천․초․목과 같은 ‘땅의 무늬’가 있으며, 인간에게는 시․서․예․ 악과 같은 ‘인간의 무늬’가 있다. 시․서․예․악과 같은 ‘인간의 무늬’ 는 비록 인간이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것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 로는 우주자연의 무늬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늘에 자연의 길인 천도(天 道)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인간이 걸어야 할 인도(人道)가 있으며, 인도는 천도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도를 본받아 그 보편성과 항 상성을 구현한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인도의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 는 효(孝)나 예(禮) 같은 윤리규범도 ‘천경지의(天經地義)’라고 불러, 시 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우주적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이승환, 2007: 29).
이상과 같이, 동양사상에 나타난 人文의 문자적 의미와 특히 주역에 나 타난 人文을 통하여 인문의 의미를 유추해볼 때, 공영달의 해석을 토대로 한 러우위례의 정의가 이를 종합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문이란 무력이 아닌 일종의 문명화된 방법으로, 즉 시·서·예·악으로 민중 을 교화하고 이로써 인륜의 질서가 잡힌 이상적인 문명사회를 세우는 것(樓 宇烈, 황종원 역, 2011: 92)이다.
특히 주역에 나타난 人文의 의미를 해석하 는 학자들의 공통되는 바는, 人文이 사람을 무력으로써 그치게 하지 않고 문명한 덕으로써, 달리 표현하자면 자연상태에서의 야만성(barbarism)으로 부터 벗어나 일종의 문명화(civilization)된 방법을 통하여 바람직한 인간으 로 교화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세우도록 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 다는 점이다. 이로써 人文이라는 말이 갖는 원형적인 의미를 정리하자면, 人文은 자 연에 아로새겨진 ‘인간의 무늬’로서, 인간이 자연상태로서의 야만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종의 문명화된 방법을 통하여 인간다움을 갖추도록 하 고,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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