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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관심분야/인문학

[인문학] 인문학을 활용한도덕과 교육 개선방안 연구(6)

박사학위 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 이언주

 

(2) 인문학의 서양적 의미

 

가. 그리스의 인문교양 : 혼(psyche)의 완성과 아레테(arete)의 실현 흔히 서양에서 인문학은 로마의 키케로가 그리스어 paideia를 라틴어 humanitas로 옮긴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문학 의 시원은 보다 거슬러 올라간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된다. 주지하듯 스파 르타보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아테네는 법률 이외 어떠한 주인에게도 예속 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동체’였다. 아테네인들은 그리스의 다른 폴 리스 사람들조차도 바르바로이(barbaroi)로 여길 만큼,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의 교양과 정체성을 자부하였다. 민주주의와 함께 자유인의 교양을 아테네 인들의 중요한 덕성으로 자부하였던 점은 페리클레스(Perikles)의 『민족제 전연설』에 나타난다.

 

인간이 지닌 좋은 것 중, 신으로부터 받은 것을 제외하고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것치고 우리 아테나이에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으며, 대부분은 아테나이로부터 생겨났다. 우리 아테나이는 사료(史料)와 언설 (言說)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능가하므로 아테나이에서 배운 사람들 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교사가 된다. 그리스인의 이름은 이제 출생의 이름이 아니라 정신의 이름으로 생각되고, 교양을 나누는 사람들은 이 제 그리스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페리클레스『민족제전연설』; 이광주, 2009: 34)

그리스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교양에 관하여 알 수 있도록 하 는 첫 번째 단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이다. 소크라테스의 등장으로 인하 여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 자신에 대한 앎과 자기 영혼의 완성을 기하고 자 하는 철학적 사유가 등장한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Apologia)』은 소크라테스가 평생 그토록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자 했던 대상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타 락시킨다는 이유로 자신을 고발한 고발자와 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 를 변론하는 장면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토록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자 했던 대상은 바로 ‘자연’이 아니라 ‘인간’임을 강조한다(Platon,『소크라 테스의 변론』3장). 당시 이오니아 학파였던 탈레스(Thalēs)나 엠페도클레스 (Empedoklēs)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연의 본성이나 원질에 대하여 탐구한 반면, 소크라테스 자신은 자연에 대한 사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며 자신이 탐구하고자 했던 바는 오직 ‘인간에 대한 탐구’였음을 밝히며, 이 를 자연학으로부터 경계 짓는다. 여기서 ‘자연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 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당시 지배적 이었던 ‘자연’에 대한 이오니아 학문의 실망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오니아 학파는 인간의 ‘정신의 태도’ 성취라는 업적을 이루었는 데, 이 때 ‘정신의 태도’란 대상이 주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실천적 행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사유에 의해 심사숙고될 수 있다는 것이다(F. M. Conford, 박영도 역, 2002: 65). 이에 반해 플라톤(Platon), 크세노폰(Xenophōn)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모두는 소크라테스가 그의 청년시절에 자연에 대한 탐구의 방 법들과 결과들에 환멸을 느낀 이후, 세계의 기원과 같은 문제들을 결코 논 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일치하고 있다(Conford, 박영도 역, 2002: 66).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회상(Memorabilia)』에서 몇 가지 이 유들을 덧붙이면서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그는 ‘만유의 성질에 대해서도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의론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다른 학자들처럼 ’우주(Cosmos)'의 성질을 묻거나, 개개 의 천체 현상을 지배하는 필연을 묻거나 하는 일 없이, 오히려 이러한 문제를 캐고 드는 인간의 언어도단을 지적했다.(중략) ‘만유의 성질’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들도, 어떤 자는 실재는 하나뿐이라고 하고 어떤 자 는 그 수가 무한하다고 한다. 어떤 자는 만물은 영원히 유동한다고 하 고, 어떤 자는 단 한 가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그러 나 그는 이 사람들에게 다시 묻는다. 인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자들은 그들이 배워 아는 바를 결국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서 쓰고, 그 희망하 는 것을 행하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신적인 사상을 탐구하는 자들도 일단 이들이 어떠한 필연에 의하여 생겼는가를 알았을 때에는, 이것에 의하여 원하는 대로 바람이나 물이나 계절이나, 그 밖에 무엇이든 필요 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낳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일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들 각각의 사상의 원인을 알기만 하면 족하단 말인가라고.(Xenophon, 최혁순 역(2015)『소크라테스 회상』제1 권 제1장 11절-16절).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오직 인간만을 주된 관심사로 두었 다. 그는 인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자들은 그들이 배워 아는 바를 결국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서 쓰고, 그 희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생각함으로써 인간을 훌륭한 개인 내지 시민으로 만들게 하는데 쓸모가 있는 반면, 자연학을 연 구하는 자들은 그 학문적 쓸모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요컨대 소크라테 스는 ‘자연학’이 인간에 대한 앎과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조금도 밝혀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Conford, 이종훈 역, 2002: 72).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행복이란 자신의 ‘혼(魂)의 완성’(the perfection of the soul), 즉 “가능한 한 인간의 영혼을 좋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Conford, 이종훈 역, 2002: 75)”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욕구하는 그 밖의 모든 목적들은, 엄격히 말해 서 그것들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Conford, 이종훈 역, 2002: 75)” 고 주장했다. 만약 그러한 목적들이 조금이라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면, 그것은 단지 ‘혼의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Conford, 이종훈 역, 2002: 75).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탐구하 는 일과 이 사명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허용되는 자신의 무죄석방을 거부하 면서, 그의 탐구와 사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을 반기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보다는 차라리 신을 따를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살아 있 는 동안은 그리고 계속해서 일할 기력이 남아 있는 동안까지는, 철학을 하는 것도, 여러분들께 충고하는 것도, 그리고 언제이고 여러분들 가운 데 누구든지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한테는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 주는 것 또한 그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또한 언제나처럼 해오던 말들을 해줄 것입니다. 말 하자면 ‘빼어난 자여, 그대는 가장 위대하고 슬기와 힘으로 가장 이름이 나 있는 나라인 아테네의 시민이면서도, 그래 재물에 대해서는 되도록 많았으면 하고 관심을 쏟으면서 그리고 명성과 명예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면서, 지혜와 진리에 관해서 그리고 자신의 혼(魂)이 온전하게 완성되 게끔 혼에 관해서 마음을 쓰거나 생각해보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나요?’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반박하여 자기는 마음 을 쓰노라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곧 제가 그 사람을 보내주거나 그와 헤어져버리지는 않을 것인즉, 저는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하여 그를 시험하고 심문할 것입니다.(하략)(Platon, 박종현 역(2003),『소크라테스 의 변론』29d/30c).

 

위의 변론에서 알 수 있듯이, 소크라테스가 “인생에 있어서 보살필 만 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은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이 아니라, 혼 (psyche)(Platon, 박종현 역(2003), 『소크라테스의 변론』29d/30c)”이다. 그 런데 인간의 ‘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자연학과는 다른 종류 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바로 ‘덕은 지식이다’ 라는 패러독스에서 소 크라테스가 ‘ ’과 동일시했던 지식이다. 콘포드는 이 지식이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들 각자의 속에 있는 자아 또는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곧 인 생의 참된 목적인 혼을 인지하는 자기인식(self-knowledge)이라고 부를 수 도 있는 종류의 것(Conford, 이종훈 역, 2002: 80)”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gnoti sauton).”라는 델포이 신전의 문구를 자 신의 평생 신조로 여긴 바와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지(知)는 목수나 전사의 특수한 노예 적 기술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그것은 자유롭고도 고결한 품성을 갖춘 자유인의 보편적이고 인문적인 지로 이해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등에’에 비유하면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돌봄으로써 이 참된 지혜를 추구할 것을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설득하였다.

 

… 저에 대해 익살스러운 말로 말한다면, 신이 이 나라에 보낸 일 종의 등에입니다. 이 나라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군마 같아서 운동이 둔하며 따라서 각성이 필요합니다. 나는 신이 이 나라에 부착해놓은 등 에이며, 따라서 하루종일 어디서나 한결같이 여러분을 붙잡고 각성시키 고 설득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Platon, 황문수 역(2007),『소크라 테스의 변론』18).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고대 그리스로부터 탄생한 인문교양이란 자 기 영혼을 돌보고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영혼을 돌봄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기하고자 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정신을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통찰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 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갖게 되는 인간의 교양이란 보편적이고 인문적인 것으로서 자유롭고도 고결한 인간의 품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리스적 교 양이란 덕(arete)을 완전히 실현함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덕의 완전한 실현이 이상화되는 그 리스적 교양을 떠받치는 ‘덕(arete)’이란, 개인적 차원의 덕뿐만 아니라 공적 인 차원의 덕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아렌트(H. Arendt)가 그리스인 의 덕은 언제나 공적 영역의 것, 즉 폴리스적인 것이었다고 강조한 바와 같이(이광주, 2009: 49), 그리스적 교양이란 개인의 교양에 그치지 않고 궁극 적으로 정치적․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였다. 이는 ‘지를 사랑하는 자’는 ‘폴리스를 사랑하는 자’라고 한 플라톤의 견해에서나,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이해하고 훌륭한 인간의 덕을 바람직한 국가체제와 결부시켰던 아리스토텔 레스의 견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리스적 교양을 갖춘 이상적 인간상이란 결코 관념적․추상적인 진공 속 인간상이 아니라, 그리스의 풍토 특히 폴리 스의 정치체제 속에서 싹트고 자란 살아 있는 이상이었다(이광주, 2009: 46). 요컨대 그리스적 교양이란 개인적 교양과 시민적 교양을 고루 갖춘 상 태를 의미하며, 덕의 완전한 실현을 이상적인 상태로 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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